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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5 23:14

진리의 참모습 깨달음2011/03/15 23:14

저는 태어날때부터 법명을 받아서 원불교와 인연을 맺은지 햇수로는 43년이 되었습니다
저희집은 할머니때부터 원불교 집안이니 그 기나긴 시간동안에 원불교는 저에게 참 남다른 의미가 있으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형제는 삼형제인데 어렸을때 형제들끼리 서로의 말이 못 미더울때면 의례껏 "너 부처님께 맹세할 수 있어"라고 다그치곤 했습니다. 그러면 더이상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될 만큼 어릴적 부처님은 죄를 지으면 벌을 착한일을 하면 상을 주는 거역하지 못할 무서운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처님은 우리 원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진리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진리를 발견하신 분이고 진리는 항상 그렇게 존재하며 거역하지 못할 불변의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이 부처님이다. 원불교에서는 이분을 소태산 대종사님이라 부른다. 이런생각을 한것이 중학교 무렵이니까 참 기특한 생각을 한 것이죠.


제가 원불교에 한발 더 다가가게 된 동기는 군대였습니다.
혼자 교전봉독도 때때로 좌선도 하면서 나도 진리에 다가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저는 "인간은 모자라고 부족하다. 그런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여 부처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수행이라 한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항상 긴장하게 되고, 내가 하고자하는 일이 잘 되면 그렇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눈쌀을 찌뿌리며 불평을 하고 그렇지 못하면 항상 부족한 나에게 못마땅해 하는 그런 일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피곤하고 짜증나는 사람은 다른사람이 아닌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속으로 훈계하고 또 내가 실수하면 스스로의 못남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행복해질려고 편할려고 시작한 원불교 공부가 저의 또다른 속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때쯤 저에게 다가온 글귀는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자"였습니다.

아뿔싸~~ 그때까지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었는데... 이미 저는 부처였던 것입니다.
이미 부처인 나를 내가 몰라주고 나는 근사한 부처의 모습으로 부처의 상을 만들고 그토록 나를 괴롭히고 있었구나.
내가 부처이니 저사람도 저 모습 그대로 부처인것을....

제가 걸어다니는 길중에 한적하지만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그때면 저는 어김없이 망설여야 했습니다. 분명히 빨간불인데 다른사람들은 슬쩍슬쩍 건너는 것입니다.
그때면 제 마음은 난리가 납니다.
"다른사람들도 건너는데 그냥 건너자. 어때~ 그냥 얼른 건너는 거야" 그러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어허~ 원불교를 다닌다는 사람이 질서를 지켜야지"
이거참 그냥 건너자니 죄를 짓는거 같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은 다 건너는데 나만 달랑 기다리고 있으니 괜스러 멋쩍기도 하고 유난을 떠는 것 같아 기다리면서도 얼굴이 마구 달아 올랐습니다.
이를 어째~~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분명히 나는 부처인데 내가 하는 행동은 부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전을 통한 마음공부법으로 비로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신호등을 바라보기전, 다른 사람들이 건너는 것을 보기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인원이의 마음이 신호등을 보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건너는 것을 보는 순간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란해진 것입니다. 원래는 없었지만 움직여 요란해진 마음도 또한 인원이의 마음이고 진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니 내 마음속의 요란함만 인정해주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요란함은 있되 그 때문에 또다른 요란함은 없었고 그 원천의 요란함도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미 마음이 편안해지고 나니 급히 건너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으니 웃으며 초록불이 켜질때까지 기다리면 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부처를 근사하게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는 항상 나와 함께 했었던 것입니다.

요즘도 저는 자주 요란하고 자주 어리석고 자주 그릇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더이상 불안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꾸 세우고 그 방법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진리가 될때까지 기다릴 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국의 유명한 밴드 비틀즈가 1970년에 발표한  Let it be라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제 두서없는 이야기를 마칠까합니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내가 힘든 근심의 시기에 처해 있을때,

Mother Mary comes to me
어머니 께서는 내게 다가와

Speaking words of wisdom
지혜로운 말씀을 해주셨어요

Let it be
있는 그대로 두어라

And in my hours of darkness
내가 암흑의 시간 속에서 헤매이고 있을 때에도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어머니는 내 앞에 바르게 서서

Speaking words of wisdom
지혜로운 말씀을 해주셨어요

Let it be
있는 그대로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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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어진동그라미
2009/05/12 13:55

대산상사님 요가선입니다. 깨달음2009/05/1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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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진동그라미

불교(조계종)의 좌선 - 출처/불교 아카데미

참선은 생사의 근원이 무엇이고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앎으로써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불교의 다른 수행법들도 모두 궁극적 목적은 해탈이고 성불이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빠르게 성품을 보게 하는 수행법이 바로 참선이다.
참선과 유사한 말로 선, 선나, 선정, 삼매, 지.관 등이 있다. 참선이란 이런 수행법들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하셨던 초선에서 상수멸에 이르는 선정과 37조도품, 위빠사나와 호흡관에서부터 중관의 반야공관, 유식의 유식관, 화엄의 해인삼매 천태의 일심삼관 등 실로 다양한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참선하면 중국 선종의 수행법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임제선풍에 따른 간화선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화두참구가 참선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화두란 말머리 즉, 말 나오기 이전 자리를 말하고 참구란 생각과 분별을 끊고 직입하는 것을 말한다. 직입하면 말 나오기 이전을 봄이요, 성품을 봄이다. 즉 견성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담박에 깨치는 것이므로 돈오라고 한다.
이때 직입하게 하는 힘은 의심에 있다. 오직 의심으로 똘똘뭉쳐 모든 것을 잊고 무엇일까를 탐구하다 보면 철벽처럼 어둡고 깜깜하고 아득하던 화두가 툭- 트이는 순간, 화두가 타파되고 모든 낡은 껍질들을 벗게 된다. 나와 우주 만물의 참성품을 본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었으며 거짓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참은 또 어떻게 그것과 함께 그렇게 오묘하게 있는지를 알게된다.

==> 간화선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종파는 조계종이다. 태고종이나 다른 종파의 좌선법은 어떠 한지 모르겠다. 사이버 유랑 시대에 본사 사이트나 관련 홈피를 찾아봐도 참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몇몇 곳을 제외한 조계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불교 제2의 종파인 천태종의 수행법은 '관세음보살'을 음성으로 반복 주문하는데 만트라와 부분 가깝다 하겠다. 외형적(물질적)으로 크게 번창하고 있는 종파이지만 관세음보살과 소원성취라는 중생에 친숙한 매개로 크고 있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대부분의 종교가 본질에서 망각되지만, 속세의 끄달림으로 이것저것 욕구가 많아 번뇌에 빠져있는 중생을 놓아버리도록 인도하기 보다는, 절에 보시를 많이 함으로써 공덕을 쌓고 열심히 관세음보살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북돋는 것이다...  

원불교의 좌선법 - 출처/원불교 정전 

1. 좌선의 요지(坐禪-要旨)

대범,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 그러나, 만일 망념이 쉬지 아니한즉 불 기운이 항상 위로 올라서 온 몸의 수기를 태우고 정신의 광명을 덮을지니, 사람의 몸 운전하는 것이 마치 저 기계와 같아서 수화의 기운이 아니고는 도저히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것인 바, 사람의 육근 기관이 모두 머리에 있으므로 볼 때나 들을 때나 생각할 때에 그 육근을 운전해 쓰면 온 몸의 화기가 자연히 머리로 집중되어 온 몸의 수기를 조리고 태우는 것이 마치 저 등불을 켜면 기름이 닳는 것과 같나니라.그러므로, 우리가 노심 초사를 하여 무엇을 오래 생각한다든지, 또는 안력을 써서 무엇을 세밀히 본다든지, 또는 소리를 높여 무슨 말을 힘써 한다든지 하면 반드시 얼굴이 붉어지고 입 속에 침이 마르나니 이것이 곧 화기가 위로 오르는 현상이라, 부득이 당연한 일에 육근의 기관을 운용하는 것도 오히려 존절히 하려든, 하물며 쓸데 없는 망념을 끄리어 두뇌의 등불을 주야로 계속하리요. 그러므로, 좌선은 이 모든 망념을 제거하고 진여(眞如)의 본성을 나타내며, 일체의 화기를 내리게 하고 청정한 수기를 불어내기 위한 공부니라.

2. 단전주의 필요

대범, 좌선이라 함은 마음을 일경(一境)에 주하여 모든 생각을 제거함이 예로부터의 통례이니, 그러므로 각각 그 주장과 방편을 따라 그 주하는 법이 실로 많으나, 마음을 머리나 외경에 주한즉 생각이 동하고 기운이 올라 안정이 잘 되지 아니하고, 마음을 단전에 주한즉 생각이 잘 동하지 아니하고 기운도 잘 내리게 되어 안정을 쉽게 얻나니라. 또한, 이 단전주는 좌선에만 긴요할 뿐 아니라 위생상으로도 극히 긴요한 법이라, 마음을 단전에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 내리면 수화가 잘 조화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하나니, 이 법은 선정(禪定)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실로 일거 양득하는 법이니라. 간화선(看話禪)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혹 이 단전주법을 무기(無記)의 사선(死禪)에 빠진다 하여 비난을 하기도 하나 간화선은 사람을 따라 임시의 방편은 될지언정 일반적으로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니, 만일 화두(話頭)만 오래 계속하면 기운이 올라 병을 얻기가 쉽고 또한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선에 취미를 잘 얻지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좌선하는 시간과 의두 연마하는 시간을 각각 정하고, 선을 할 때에는 선을 하고 연구를 할 때에는 연구를 하여 정과 혜를 쌍전시키나니, 이와 같이 하면 공적(空寂)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분별에 떨어지지도 아니하여 능히 동정 없는 진여성(眞如性)을 체득할 수 있나니라.

==> 원불교의 좌선은 호흡법이 기존 불교와 조금 다르며, 좌선시 간화선 처럼 화두가 없다. 불상을 모시지 않으며 대신에 석가모니가 깨달았던 그 상징으로 일원상을 두고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와 같은 격이겠으며, 죽은 선인을 모시기 보다는 그 가르침을 좇는다. 순수한 토속 불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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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의 유래

출처 / 불교 아카데미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修行)방법. 선은 팔리어(語) 자나(jh嚆na)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이다. 산스크리트의 디야나(dhy嚆na)는, 타연나(馱衍那)로 음역한다. 이를 정(定)·정려(靜慮)·기악(棄惡)·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하며, 음사와 의역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선사상(禪思想)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人)이 인도에 침입하기(BC 1300년경) 이전으로 생각된다. 인도 원주민의 것인 인더스문명(BC 2800∼BC 1800년경)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음. BC 2500년경)이나 석제의 흉상(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 BC 2000년경)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瑜伽]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 베다》(BC 1200∼BC 800 편찬)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카타카 우파니샤드》 및 《마이트라야나 우파니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ahman:우주의 원리)과 아트만(嚆tman: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요가사상은 불교에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에서는 불교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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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진동그라미
행복은 이미 지금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 쫓아가고 있다. 그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되는 것인가? 공부 잘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성공하면 행복할까?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마음에 드는 배우자 만나며 명예와 업적을 쌓으면 되는 것인가? 무엇인가를 이루면 얻을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이들은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사막의 신기루를 찾아가는 것과 같이 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이미 있다. 광대무량한 낙원은 바로 내 앞에 늘 펼쳐져 있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지금 여기 나에게 주어진 것을 만족하는 데에 있다. 이는 쉽고 간단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만족하는가? 지금 만나는 인연들을 고마워하는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소중히 하는가? 이들 물음에 예- 하고 대답한다면 그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 내가 사는 곳에 불만을 품고 있다면 그 순간 나는 불행해 진다. 지금 만나는 인연들에 대해서 원망이 있으면 괴로워진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불평이 있으면 힘들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않으면 고통이 따른다. 그러면 자연히 내일 더 좋은 여건이 올 것을 기대 한다. 좋은 인연을 만날 것을 기대하며 더 좋은 일들이 찾아 올 것이라고 희망한다. 이것이 병든 마음이다.

우리는 그동안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만족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 언제나 오늘 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것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불행의 출발이었다. 현실은 내 기대와 욕심처럼 되지 않는다. 여기에 아픔이 있고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미래의 희망과 꿈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이 행복해 질 수가 있다.

조용히 숨을 쉬면서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을 느껴 보자. 그러면 누구나 깊은 평안이 찾아올 것이다. 이렇게 숨쉬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게 된다. 지금 내 존재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소중히 하고 이를 좋아해 보자. 그러면 더 이상 바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서 말하고 먹고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 것이다. 가는 길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자. 내가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을 위해 앞만 보고 허겁지급 달려가고 있다면 잠시 멈추어 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행복을 왜면하고 그렇게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주어진 자신의 존재와 삶을 잊고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이다.

업적을 쌓고 재산과 명예를 얻고 성공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행복은 이미 손안에 있다. 지금 나에게 주어져 있다. 이를 느끼고 음미하며 즐기면 된다. 순간순간 나의 삶이 그대로가 행복이다. 이를 만족하면 된다. 이 세상에는 불행과 고통이란 없다. 온갖 기대와 바람을 내려놓고 불평하며 원망하지 않으면, 이미 무한한 행복이 내 안에 주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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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진동그라미
과거에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이 진리라고 믿고 살았다. 그러나 깨어난 과학자들에 의해서 지구가 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들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죽였던 때가 있었다. 이러한 무지가 기원후 1400년 동안 지속되었고 천동설이 인간의 뇌리에 깊이 각인 되어서 오늘날 까지도 우리는 해가 뜨고 진다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방송에서 일기예보를 들어보면 지금도 아침저녁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지구가 돌면서 해를 마주하는 시간이 아침이고 등지는 시간이 저녁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마음공부하면서 경계 발견 공부를 많이 하였다. 마음이 일어나는 원인이 경계라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경계를 찾아서 마음을 대조하고 참거나 피경하며 나아가 상대를 이해하는 공부를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상하고 화가 나며 괴로울 때에 이것이 경계(상황이나 상대) 때문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고통과 아픔은 자기 마음의 상처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 내면의 문제로 화가 나고 두렵고 불안한 것이다. 마음공부에서는 이들이 전혀 경계 때문이 아님을 정확히 밝혀주어야 한다. 깨어나서 보면 누구도 나를 괴롭힐 수가 없으며 나도 또한 상대를 상처 줄 수가 없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을 발견하고 상대를 향한 일체의 원망과 죄의식이 사라질 것이다.

경계는 오히려 깊은 고마움으로 받아들여야 할 은혜로운 손길이다. 내가 환영해야 할 삶의 소중한 거울이며 처처불(處處佛)이다. 오늘날 마음공부가 일반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터넷 사이버 대학에서 강의만으로 서로 하나로 교감하며 만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깨어남에 공감하고 그들이 갈등하는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아픔을 살펴보면 우리는 똑같은 모습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팔에 심한 상처로 피멍이 들고 부어있는데 옆에 있는 어떤 친구가 반갑다고 그 상처 난 곳을 잡았을 때 대부분 <왜 나를 아프게 하느냐?>고 하며 화를 낸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상대(경계)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명확한 원인은 그가 가진 상처 때문에 아픈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누가 힘주어 만진다하여도 아프다는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아픔이 없고 건강하다면 주위의 어떤 어려운 경계에서도 상처받지 않는다. 반면에 아픔이 많은 사람은 조금만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화를 낸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의 문제 때문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때 우리는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공부를 하였다. 무조건 참아라. 아파도 참아야 한다. 고 말했다. 또한 은혜로운 사람(경계)들을 오히려 조심해라. 위험하다. 고 주의를 주었다. 더 당혹스런 것은 잘못이 없는 상대에게 시비이해를 가려주며 용서하고 이해하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는 마음이 자신의 문제임을 알지 않으면 결국은 문제를 피하고 외면하며 계속 같은 상황을 깨어날 때까지 반복해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음공부하면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단순히 그렇게 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를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분별의 안경을 쓰고 있는데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을까? 예를 들면 자신이 빨간색의 안경을 쓰고 보면 상대가 있는 그대로가 아니고 붉게 보일 것이다. 그동안 붉은 것은 나쁘다. 고 세뇌되어 있다면 이를 나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면 빨간 것은 나쁘지 않고 그냥 괜찮은 것이다. 고 이해하며 수용하여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상대를 잘 이해하고 봐주는 사람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공부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하지 않게 되며 자기 자신이 지닌 분별 주착에 대해서는 모르게 될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봐 주는 것은 결국 문제가 상대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은 어느 듯 상대의 꼴을 잘 봐 주는 이해심 많은 사람이 되나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분별을 놓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먼저 상대를 통해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이 일이 마음공부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 바로 내가 분별의 안경을 쓰고 있어서 상대가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를 알아서 나를 보게 되면 그동안 분별로 바라본 그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만나게 되며 상대는 나를 일깨우는 고마운 부처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나의 분별이 착각임을 알게 되고 이를 내려놓게 된다. 이것이 진정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작업이다.

마음공부는 문제가 상대에 있지 않고 나 자신에게 있음을 철저히 일깨우는 공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화나고 속상하며 미운 마음이 일어날 때 경계가 아니고 자신을 여실히 들여다보며 <아하! 분별심(생각)이구나.> 하고 자신 있게 말해야 한다. 그러면 나의 판단과 어두운 분별을 정확히 보게 되고 이를 내려놓는 길을 찾게 된다. 문제 해결의 명쾌한 해답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청소년에게도 먼저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어른들 보다 더 진솔하고 명료하게 자기 마음을 본다. 어른들이 오히려 자신을 보지 않으려고 하며 경계를 문제 삼는 경우가 많다. 누구라도 내 앞에 경계는 지금 그렇게 있어야 하며 그를 통해서 누구나 자신을 보는 공부를 하여야 한다.

여기에 마음이 보여주는 멋진 소식이 있다. 나의 문제와 똑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화가 나고 미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자기를 성찰하게 되면 놀랍게도 자신을 거부하고 혐오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인정하게 되며 자연히 문제를 가졌다고 보이는 다른 사람도 받아들인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수용하게 된다. 따라서 경계가 찾아와도 마음이 요란하지 않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대종사님은 성리품 5장에서 만법을 통하여 한 마음 밝히라(通萬法明一心). 그러면 큰 깨달음(大圓正覺)을 이루리라. 고 하셨다. 마음공부는 이 원리를 현실에서 직접 체험하게 한다. 삶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게 해 줄 것이다. 이는 손바닥에 놓인 구슬을 보는 것처럼 단순하고 명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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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진동그라미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대들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억지로 없애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곳과 때에 마땅하게 써서 자유로운 마음 기틀을 걸림 없이 운용하되 중도에만 어그러지지 않게 하라고 하며, 가벼운 재주와 작은 욕심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재주와 발심의 크지 못함을 걱정하라 하노니, 그러므로 나의 가르치는 법은 오직 작은 것을 크게 할 뿐이며, 배우는 사람도 작은 데에 들이던 그 공력을 다시 큰 데로 돌리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큰 것을 성취하는 대법이니라.](대종경 수행품 37장)

많은 사람들이 화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분별을 하고 있으며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면서 대부분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분노하는 것은 나쁘므로 어떻게 하면 화를 내지 않게 하는가를 고심하고 있다. 그래서 반드시 이를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무조건 멈추고 참는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

특히 어린이나 학생들이 발표하는 마음공부일기를 보면 대부분 일어나는 마음을 참는 공부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가 겉으로는 해결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마음이 깨어나는 일을 어렵게 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참는 공부를 유무념으로 오랫동안 많이 하면 어느 듯 자기감정을 잃어버리고 화를 낼 줄 모르며 감정이 없는 불행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서 마음의 깊은 곳에는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서 이것이 여기 저기 몸을 상하게 한다. 이 분노가 밖으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필요 없는 긴장을 많이 한다. 정신을 많이 쓰게 되어 늘 피곤하며 두려움이 많아지고 활기찬 삶을 살수가 없게 된다.

공부한다고 하면서 자기감정을 속이게 되고 겉과 속이 다른 근엄한 모습을 지니며 답답한 삶을 산다. 결국 쌓인 분노로 어두운 무명심이 생기고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깨어나야 한다.

대종사님은 대종경 수행품에서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을 걸림 없이 운용하라고 하시고, 이것이 큰 도를 성취하는 대법이라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분별하여서 <희>는 좋아하고 <노>는 싫어하며 <애>은 싫어하고 <락>은 좋아하였다.

이러한 분별주착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여실히 살펴야 한다. 나에게 일어나는 마음들을 분별없이 잘 살펴보면 일어나는 모든 마음이 소중하며 나를 깨어나게 하고  모두가 나에게 필요한 것임을 발견한다.

일어나는 마음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며 모두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뿐이다. 기쁜 마음도 좋은 것이며 분노도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다. 슬픔도 소중하며 즐거움도 좋은 것이다. 대종사님은 이들 마음을 억지로 없애지 말고 수용하여 걸림 없이 운용하라 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우리가 기쁠 때 기뻐하고 분노할 때는 분노하고 슬플 때 슬퍼하고 즐거울 때 즐기는 것이 깨어있는 삶이고 살아있는 사람의 건강한 모습이다. 일어나는 마음이 어떤 것이라 하여도 반갑게 수용하고 이를 소중히 하며 천천히 느껴보자. 그러면 내 마음이 살아나고 편안해 질 것이다.

분노를 싫어하고 참으면 그 분노가 마음속에 쌓여서 늘 화가 나 있게 된다. 내 이성으로 단속할 힘을 잃어버릴 때는 이것이 밖으로 튀어 나온다. 그러므로 늘 경계해야 하고 긴장해 있어야 하며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마음에 분노가 쌓인 사람은 필요 없는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되어 이것 때문에 쉽게 피곤함을 느낀다. 분노를 쌓아두면 독이 된다. 따라서 밖으로 쏟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잘 살펴보라.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안내는 사람보다 훨씬 마음이 단순하고 뒤끝이 없으며 건강하게 산다. 화를 참는 것은 문제가 되고 만병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화는 우리가 상대를 향하지 않고 잘 표현하는 공부를 하여야 한다.

신분의성(信忿疑誠)중의 분(忿)이 한문으로 분노할 분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한때에 어느 국어선생님이 교전에 분발할 분(奮)자를 분(忿)으로 사용하고 있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여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분노는 나쁜 것이라는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문제가 된다. 그러나 경전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분별에 잘못이 있는 것이다. 분노를 참고 쌓아두는 것이 문제이지 깨끗이 표현하는 화는 진솔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건강한 에너지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어나는 화를 분별없이 수용하여서 잘 살펴보면 이 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두운 생각 (분별성과 주착심)이 원인임을 알게 된다. 현실경계는 나의 마음을 비추어주는 거울인 것이다. 화가 날 때 내 앞의 현실(경계)의 거울을 잘 살펴보면 내 속에 집착된 어두운 생각들을 상대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를 내 것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이고 소중히 수용하면 나는 깨어나서 고통의 원인이 소멸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마음이 요란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쉽게 자신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계가 나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믿고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깨어서 보면 이는 큰 착각임을 알게 된다. 현실 경계는 나를 괴롭힐 힘이 없다. 다만 나의 분별주착심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깨어나서 나의 분별만 내려놓으면 된다. 도봉 마음공부 방에서는 이를 간단한 표를 만들어서 요란함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서 이를 수용하고 깨어나는 공부를 하고 있다. (다음 카페<지금까지 나를 괴롭힌 사람은 없다.>를 참고 바람)

누적되어 쌓여 있다가 터져 나오는 화는 자신과 주위를 놀라게 한다. 더욱이 이 화가 상대(경계) 때문이라는 생각을 할 때 이는 계속되는 아픔이 누적되어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화가 날 때 이를 수용하여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발견하면 나는 깨어나고 마음속에 쌓여있는 화는 흔적 없이 정리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마음공부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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