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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조계종)의 좌선 - 출처/불교 아카데미

참선은 생사의 근원이 무엇이고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앎으로써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불교의 다른 수행법들도 모두 궁극적 목적은 해탈이고 성불이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빠르게 성품을 보게 하는 수행법이 바로 참선이다.
참선과 유사한 말로 선, 선나, 선정, 삼매, 지.관 등이 있다. 참선이란 이런 수행법들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하셨던 초선에서 상수멸에 이르는 선정과 37조도품, 위빠사나와 호흡관에서부터 중관의 반야공관, 유식의 유식관, 화엄의 해인삼매 천태의 일심삼관 등 실로 다양한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참선하면 중국 선종의 수행법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임제선풍에 따른 간화선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화두참구가 참선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화두란 말머리 즉, 말 나오기 이전 자리를 말하고 참구란 생각과 분별을 끊고 직입하는 것을 말한다. 직입하면 말 나오기 이전을 봄이요, 성품을 봄이다. 즉 견성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담박에 깨치는 것이므로 돈오라고 한다.
이때 직입하게 하는 힘은 의심에 있다. 오직 의심으로 똘똘뭉쳐 모든 것을 잊고 무엇일까를 탐구하다 보면 철벽처럼 어둡고 깜깜하고 아득하던 화두가 툭- 트이는 순간, 화두가 타파되고 모든 낡은 껍질들을 벗게 된다. 나와 우주 만물의 참성품을 본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었으며 거짓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참은 또 어떻게 그것과 함께 그렇게 오묘하게 있는지를 알게된다.

==> 간화선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종파는 조계종이다. 태고종이나 다른 종파의 좌선법은 어떠 한지 모르겠다. 사이버 유랑 시대에 본사 사이트나 관련 홈피를 찾아봐도 참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몇몇 곳을 제외한 조계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불교 제2의 종파인 천태종의 수행법은 '관세음보살'을 음성으로 반복 주문하는데 만트라와 부분 가깝다 하겠다. 외형적(물질적)으로 크게 번창하고 있는 종파이지만 관세음보살과 소원성취라는 중생에 친숙한 매개로 크고 있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대부분의 종교가 본질에서 망각되지만, 속세의 끄달림으로 이것저것 욕구가 많아 번뇌에 빠져있는 중생을 놓아버리도록 인도하기 보다는, 절에 보시를 많이 함으로써 공덕을 쌓고 열심히 관세음보살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북돋는 것이다...  

원불교의 좌선법 - 출처/원불교 정전 

1. 좌선의 요지(坐禪-要旨)

대범,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 그러나, 만일 망념이 쉬지 아니한즉 불 기운이 항상 위로 올라서 온 몸의 수기를 태우고 정신의 광명을 덮을지니, 사람의 몸 운전하는 것이 마치 저 기계와 같아서 수화의 기운이 아니고는 도저히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것인 바, 사람의 육근 기관이 모두 머리에 있으므로 볼 때나 들을 때나 생각할 때에 그 육근을 운전해 쓰면 온 몸의 화기가 자연히 머리로 집중되어 온 몸의 수기를 조리고 태우는 것이 마치 저 등불을 켜면 기름이 닳는 것과 같나니라.그러므로, 우리가 노심 초사를 하여 무엇을 오래 생각한다든지, 또는 안력을 써서 무엇을 세밀히 본다든지, 또는 소리를 높여 무슨 말을 힘써 한다든지 하면 반드시 얼굴이 붉어지고 입 속에 침이 마르나니 이것이 곧 화기가 위로 오르는 현상이라, 부득이 당연한 일에 육근의 기관을 운용하는 것도 오히려 존절히 하려든, 하물며 쓸데 없는 망념을 끄리어 두뇌의 등불을 주야로 계속하리요. 그러므로, 좌선은 이 모든 망념을 제거하고 진여(眞如)의 본성을 나타내며, 일체의 화기를 내리게 하고 청정한 수기를 불어내기 위한 공부니라.

2. 단전주의 필요

대범, 좌선이라 함은 마음을 일경(一境)에 주하여 모든 생각을 제거함이 예로부터의 통례이니, 그러므로 각각 그 주장과 방편을 따라 그 주하는 법이 실로 많으나, 마음을 머리나 외경에 주한즉 생각이 동하고 기운이 올라 안정이 잘 되지 아니하고, 마음을 단전에 주한즉 생각이 잘 동하지 아니하고 기운도 잘 내리게 되어 안정을 쉽게 얻나니라. 또한, 이 단전주는 좌선에만 긴요할 뿐 아니라 위생상으로도 극히 긴요한 법이라, 마음을 단전에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 내리면 수화가 잘 조화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하나니, 이 법은 선정(禪定)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실로 일거 양득하는 법이니라. 간화선(看話禪)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혹 이 단전주법을 무기(無記)의 사선(死禪)에 빠진다 하여 비난을 하기도 하나 간화선은 사람을 따라 임시의 방편은 될지언정 일반적으로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니, 만일 화두(話頭)만 오래 계속하면 기운이 올라 병을 얻기가 쉽고 또한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선에 취미를 잘 얻지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좌선하는 시간과 의두 연마하는 시간을 각각 정하고, 선을 할 때에는 선을 하고 연구를 할 때에는 연구를 하여 정과 혜를 쌍전시키나니, 이와 같이 하면 공적(空寂)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분별에 떨어지지도 아니하여 능히 동정 없는 진여성(眞如性)을 체득할 수 있나니라.

==> 원불교의 좌선은 호흡법이 기존 불교와 조금 다르며, 좌선시 간화선 처럼 화두가 없다. 불상을 모시지 않으며 대신에 석가모니가 깨달았던 그 상징으로 일원상을 두고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와 같은 격이겠으며, 죽은 선인을 모시기 보다는 그 가르침을 좇는다. 순수한 토속 불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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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의 유래

출처 / 불교 아카데미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修行)방법. 선은 팔리어(語) 자나(jh嚆na)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이다. 산스크리트의 디야나(dhy嚆na)는, 타연나(馱衍那)로 음역한다. 이를 정(定)·정려(靜慮)·기악(棄惡)·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하며, 음사와 의역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선사상(禪思想)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人)이 인도에 침입하기(BC 1300년경) 이전으로 생각된다. 인도 원주민의 것인 인더스문명(BC 2800∼BC 1800년경)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음. BC 2500년경)이나 석제의 흉상(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 BC 2000년경)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瑜伽]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 베다》(BC 1200∼BC 800 편찬)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카타카 우파니샤드》 및 《마이트라야나 우파니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ahman:우주의 원리)과 아트만(嚆tman: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요가사상은 불교에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에서는 불교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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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진동그라미

위빠사나의 좌선 - 출처/buddhism.org

<<수행의 실제>>
위빠사나의 수행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섯 감각기관 (眼,耳, 鼻,舌,身.意)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육체적 작용의 관찰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공부의 대상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 염처경을 기초로 한다.
 
<<호흡에 마음 집중하기>>
숨을 들이쉴 때 배가 팽창되고 내쉴 때 배가 수축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바로 이 두 동작에 주목한다. 호흡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한다. 배가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려고 억지로 숨을 크게 쉴 필요는 없다. 숨을 들이쉴 때 배가 일어나는 동작에 주목하고 숨을 내쉴 때 배가 꺼지는 동작에 주목한다.
들이쉬거나 내쉴 때, 각각 일어나는 배의 움직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배에 마음을 밀착하여 한 순간도 틈을 주지 말고 따라간다.  수행의 기초단계에 배의 일어남과 꺼짐의 동작을 분명히 느끼지 못한다면  한 손, 또는 두 손을 배에 대고 할 수도 있다.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동작이 일어날 때 각각 "일어남" "꺼짐"  이라고 마음 속으로 뇌인다. 입 속에서 우물거리거나 소리를 내지 말고 마음으로만 해야한다. 이 이름 붙이기는 마음을 집중의 대상에 주목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동작에 얼마나 마음을 밀착시켜 따라 가고, 주목할 수 있느냐이다.
일어남이나 꺼짐에의 마음집중은 일어남과 꺼짐의 동작과 동시에  되어야 한다. 일어남과 꺼짐이 항상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짧게, 빠르게,  느리게, 분명하게, 불분명하게, 굵게, 섬세하게, 긴장되게, 느슨하게, 계속적으로 혹은 단속적으로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고 주목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수행을 통해서 결국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의 무상함과 고(苦), 무아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 집중이 흩어질 때>>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할 때 자주 마음이 흩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이 흩어지면 그 흩어진 상태를 알아채고 '흩어짐' 또는 '생각''생각' 하면서 흩어진 상태에 주목한다. 또 생각으로 걱정을 하고 있으면'걱정''걱정'하면서 그 상태에  주목하고,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으면 '계획''계획' 상상하면서 '상상''상상', 과거를 회상하면'회상''회상', 하는 방법으로 그 상태에 마음을  집중한다. 이렇게 마음집중을 하고 있으면 저절로 생각이 끊어질 것이다. 그러면 다시 배의 '일어남'과 '꺼짐'의 상태에 마음을 집중한다.
이상의 설명에서처럼 위빠사나 선에서는 끊고 버려야 할  생각(망상) 이 없다. 집중하던 곳에서 마음이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가면 그곳을 다시  집중하면 된다. 즉, 망상조차도 공부의 대상이 된다. 만약, 어떤 소리에 주의가 끌리면 '들림''들림'하고 주목하다가 더 이상 주목하지 않게 되면 다시 돌아와서 '일어남''꺼짐'을 한다. 또 몸의 어떤 부위나 얼굴이 가려우면  '가려움' '가려움'하고 주목한다. 일어나는 감각에 마음을 밀착시켜 그  감각이 어떻게 변하는지, 더 강렬해지는지, 사라지는지를 세밀하게 관찰하도록 노력한다.

......

아플 때도 '아픔''아픔'한다. 찌르는 듯한 아픔인지, 에이는 듯한 아픔인지, 잡아당기는 듯한 아픔, 또는 뒤틀리는 아픔인지  아픔의 종류를 알고 면밀하게 관찰한다. 또 아픔이 그대로인지 변하는지, 아픈 부위가 한곳인지 주위에 옮겨 다니는지 이런 방법으로 아픔의 여러 가지  양태에 주목한다. 정신적인 저항없이 고요하고 초연하게 아픔에 주목한다. 아픔이 사라지기를 혹은 그대로 있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만약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사라지기를 바라는 욕구를 주목해야 한다. 아픔이 사라지든지 그대로 있든지 초연해야 한다. 만약, 이런 방법으로 주목할 수 있다면 아픔을 참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아픔은 우리를 빈틈없이 깨어있게 하기 때문에 위빠사나 선의 좋은 수행 대상이다. 이 아픔에 주목하기를 통해서도 역시 닙바나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아픔이 사라지면 다시 배의 '일어남' 과 '꺼짐'에 주목한다.

침착하지 못함, 지루함, 졸림, 혐오감, 화, 갈망 등의 여러 가지 정신적 상태들이 좌선 중에 쉽게 일어날수 있다. 이런 상태가 일어날 때도 역시 먼저 알아채고 주목한 다음 다시 배의 일어남과 꺼짐으로 돌아간다.
좌선을 하는 동안 어떤 빛이나 환상 등이 나타날 수도 있는데 역시 그때도 이 빛이나 상(相)을 '보임''보임' 하면서 주목한다. 이들 빛이나 상에 너무 오래 주목해서는 안된다. 잠시 주목한 다음 다시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한다.
초보자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하기를 끈기 있게 해야한다. 끈덕진 노력에도 불구하고'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할 수 없을 때는 '앉음' 과 '닿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일어남' 과 '꺼짐'에 주목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봐야 한다. '일어남'과'꺼짐'이 공부의 좋은 재료이고 많은 수행자들이 이것에 집중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이고 혹은 몇 주 동안이고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의 집중이  선명해질 때까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빛과 소리 관법 - 출처/관음법문

성스런 진동은 모든 종교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음(音)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천상의 음악, 로고스, 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모든 생명체 안에서 진동하며 온 우주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 내면의 선율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모든 소원을 들어주며 속세의 모든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능함이고 전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소리로 만들어졌고 이 소리와 접할 때 우리 마음에 평화와 만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후에는 존재 그 자체가 변하고 인생관이 엄청나게 좋은 방향으로 변합니다. 게다가 이 놀라운 진동은 ‘원죄’나 ‘업’이라고 부르는 바람직하지 않은 흔적도 모두 씻어 줍니다. 마치 거센 강물이 지저분한 쓰레기를 모두 쓸고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내면의 소리는 우주의 위대한 창조력입니다. 이것이 만물을 키우고 유지시킵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배 소리 등 자연의 선율 속에서 우리는 외부 세계로 화현한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저급한 수준입니다. 이 물질 세계보다 더 높은 주파수로 진동하기 때문에 육신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보다 섬세하고 높은 소리가 있습니다. 이 높은 차원으로 가는 길이 그 소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따라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높은 소리를 듣고 높은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감각을 열고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내자인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스승은 앞길을 훤히 아는 여행 가이드와 같습니다.

중략...

==> 한자어로 관음법문이라고 하며 역시 인도로부터 분파된 명상법으로 유사한 수행처가 인도에는 많고 전세계에 전파되어 있다. 대체로 빛과 소리를 관하며 만트라를 동반하는 수행법이다. 개중엔 여느나라처럼 사이비도 난무한다.
내면의 빛과 소리 명상하기, 과학적인 측면에선 추상적인 점도 없지 않지만 반면 과학이 허구라고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수행법이 옳다거나 바르다는 뜻은 아니다. 만일 잘못되었더라도 그 또한 과학은 증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 수행법을 행하는 곳 중 널리 알려진 한 명상단체는 인도에서 어느 수행승의 지도아래서 가르침을 받아오다 홀연히 독립한 베트남 여성이 스승으로 있다. 그 수행법은 위빠사나와 많이 다르며, 특이하게도 전통적 인도 수행법에서 볼 수 있는 차크라 단전들과 그 순서를 무시한다. 상단전(이마 정중앙)만을 중요시하며 빛과 소리에 집중 명상할 것을 요한다. 빛과 소리가 화두인 셈이다.
하단전 수련에 소홀해서 그런지 수련자들의 몸은 그리 튼튼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수행자들의 공통점은 각 개인은 깨끗하고 맑지만 上氣된 듯한 느낌을 준다. 주변의 오염된 환경(기운)에 영향을 잘 받고민감하여(탁한 곳에 있으면 눈이 충혈되며 두통을 호소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좀 받는 편이다. 심신이 환경에 좌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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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진동그라미